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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공수거 2014. 1. 18. 21:34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리시계/ 이서빈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 무심한 시보(時報)를 알린다.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못은 점점 얼어간다.

여름 지나 가을 가는 사이 흰 날짜 표지 건널목처럼 가지런하다.

시계 안엔 날짜 없고 시간만 있다.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 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가끔 붉거나 푸른 자국도 있다.

무게가 덜 찬 몇 마리만 얼어있는 웅덩이를 보면
손목시계보다 벗어 놓고 간 시계가 더 많을 것 같다.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 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꽁꽁 얼다 풀리다 할 것 같다.

오늘밤 웅덩이는 캄캄하고
수억 광년 연대기를 기록한 저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 하늘은
누군가 잃어버린 야광 시계다.



  
심사평


이담하 조상호 정지윤 성지형 유준상 김본희 임수현 문희정 임승훈 이인숙 이서빈, 열한 분의 시가 본심에 올라왔다. 첨단과 전위는 없었다. 열린 감각, 언어 감수성, 시를 찾아내는 촉(觸) 같은 시의 기본 재능을 갖춘 시들이다.

  이인숙의 ‘갈대모텔’, 임승훈의 ‘순종적인 남자’, 문희정의 ‘몽유 이후’, 임수현의 ‘노곡동’, 이서빈의 ‘오리시계’를 최종 결심작으로 골랐다. ‘갈대모텔’은 깔끔한 서정시다. ‘흔들리는 것들은 흔들리는 것들을 잠재우고/흔들림에 기대어 다시 일어선다’라는 시구 정도는 예사로 쓸 수 있는 시인이다. 다만 갈대숲을 새들과 바람의 모텔로 본 발상이 평이했다.

  ‘순종적인 남자’는 낯선 이미지들을 엮고 시공을 확장하는 재능이 놀라웠다. 큰 재능의 잠재성을 확인했지만 조탁(彫琢)이 더 필요하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유기적 관련도 느슨했다. ‘노곡동’은 홍수 속에 내팽개쳐진 이들의 시련을 따뜻한 관조와 유머에 버무려 시로 써냈다. 유머는 이 시인의 장점이다. 더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 사유의 입체성을 갖추시길.

  ‘몽유 이후’는 성장통을 다룬 시다. ‘쥐젖이 돋아난 어머니의 팔 안쪽을 더 이상 만지작거리지 않았다’같은 시구처럼 체험의 구체성이 도드라졌다. 안정되었으나 화법이 새롭지는 않았다. 사유의 도약이 필요하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으로 선택한 것은 이서빈의 ‘오리시계’다. 완결미가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놀랄 만큼 새롭지는 않지만 발상이 천진하고 관찰력이 좋았다. 삶과 세계를 아우르는 교향(交響)이 있고, 특히 우주 시공을 한 점 구체적 사물로 전환시키는 마지막 연이 좋았다. 신기성(新奇性)에 쏠리고 감각의 착종에 매달리는 시류에 휩쓸려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자기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심사위원:오세영, 장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