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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시안 > 신인상 당선작 / 강현숙

공수거 2014. 1. 18. 22:17

2013년 <시안 > 신인상 당선작 / 강현숙        


제30회 시안 신인상 당선작



여자의 시간을 그리다 외 4편 / 강현숙



여자의 시간을 그리다

부엌으로 가는 여자의 얼굴이 보이질 않지 쌀을 씻어 안치는 여자의 심장은 부엌 유리창에 달라붙어 펄떡거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나뭇가지에 매달린 얼굴, 하늘로 덮여 추억도 없이, 단발마의 비명도 없이 자연건조 중이다

미래를 건너온 여자는 사과껍질을 얇게 벗겨낸다 엷은 그림자 드리운 그녀의 시간들을 사각거리며 먹는다 벗겨진 껍질들은 이른 새벽 초승달로 걸리고 수만 킬로 떨어진 그곳으로부터 시간의 비늘들이 차갑게 툭 떨어진다

훤히 비치는 시간의 아침 위로 내리는 햇살들이여 살벌한 전쟁은 일어나질 않고 유리가 쩍 갈라지는 순간도 없고 가끔 스르륵 떨어지는 작은 그릇들, 살의는 금이 가고 유물로 남고 비명은 녹이 슬고 대나무 숲 속으로 바람이 되어 불어가고

스스로가 적군이 되기도 하는 마술 속이다 X-레이 선을 투과시킨 구멍 숭숭한 뼈들 사이로 풍경을 잇다가 지축을 울리며 걷는다 당신은 무한히 늘려진 시간의 원통 안과 밖으로 떠도는 구름 위를 걸어간다

쇠라*의 점묘법으로 그린 여자의 얼굴이 투명하다 산산분해된 얼굴 사이로 분명하게 되살아나오는 여자의 시간들, 왜 투명한가를 묻기 위해 링 위로 오르는 여자,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시작된다 햇살 위에 다시 햇살이 실리고 모자를 쓰고 양산을 든 여자, 잔잔한 강물 수면 위를 반짝이며 내려가다 되돌아오는 눈동자를 지닌 너

  

* George Seurat(1859-1891): 프랑스 신인상주의 화가.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등의 작품이 있다.

  

  
浮屠의 숲



1

시간의 비밀들로 무성하게 차오르는 숲에 이브의 아비가 벌거벗은 채 서 있다 신화를 완성시키지 못한 시간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엉성한 울타리, 무너진 성곽 주위로 달은 차오르다 얼른 잊혀진다 아침이면 가족들이 태양의 부스러기를 담으러 떠날 것이다 잎들이 다 떨어져 내린 숲속에 아비가 벌거벗은 채 아랫도리를 떨며 서 있다

2

시계바늘 소리가 또렷해져 오는 숲 속 푹 꺼져 있는 침대에서 그가 죽은 듯이 밀착되어 잠들어 있다 언제쯤 무거운 몸가죽을 벗어버리고 뼈를 앙상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아비의 이름으로 뼈대만 남아 떨며 서 있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무거운 몸을 지친 듯이 끌며 숲에서 오래 머물 궁리를 하고 있다 그가 내게 오늘 단풍으로 붉게 물든 숲을 보여주려 했다

3

부도의 숲에 햇빛이 들어서고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적요 속 뻥 뚫린 숲의 지붕 위로 하늘이 내려와 있다 죽어서 이름을 묻은 자들의 숲에 오래전부터 짐승들의 뼈들도 함께 묻혀 숲에서는 구름도 시간처럼 함부로 흐르지 않는다 아무도 이 의미를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 이곳에 몇 개의 부도들만 정연하게 숲을 지키고 있다

  

팝아트


한 여자가 흰 벽을 마주하고
치킨을 먹는다
흰 벽 안으로 들어간다
코카콜라를 마신다
한 여자가 흰 벽 밖으로 들어간다
갇힌 사각의 병동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해는 가볍게 떠오르고
뿌리도 없이 가볍게
전화를 거는 구름 같은 저녁,
공중을 떠도는 무수한 자음과 모음 중에서
형체를 겨우 지닌 말 한마디
사라진다, 무한하다
막창을 뒤집어 구우며 알게 된 그 여자는,
남자의 폰 바탕화면에 얼굴이 깔린 그 여자는,
뿌리도 없이, 잎도 꽃도 열매도 없이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얼굴, 얼굴, 마릴린 먼로*
한 여자가 카드를 긁어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 두 여자와 한 남자의 등 뒤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말을 하지 않는다
빈 허물 같은 육신이
고목나무에 달라붙어 있을 때도,
흔적도 없이 이 자리로 돌아와
다시 가볍게 휙 날아갈 때도, 세계는
시간을 건조하게 인쇄하고 있다
한 여자, 한 여자, 한 여자는
끝없이 인쇄 되어 나오고,

* Marilyn Monroe : Andy Warhol(1928-1987)의 그림.

  

어항 속 금붕어가 타이탄아룸을 먹어 치운다


어항 속 금붕어가 어항 밖을 유영하다 어항 속 금붕어를 바라본다 어항 속 금붕어가 타이탄아룸*을 먹어 치운다

이미 화석에 갇힌 말들이다 어항 속엔 직선으로 난 길이 보이질 않는다 구불구불 길을 오르다 막다른 길이 되기도 하고 되돌아 나오다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가끔 하루가 사라지는 날이면 미로에 갇힌 미노타우로스**의 말을 흉내 내며 숨바꼭질을 한다

빈 논 위에 쌓인 짚단 속으로 숨다 술래를 피해 잠깐 꾸는 꿈이 일그러진다 잘 지내고 있다는 말들이 겨울 찬바람 사이로 흩어지고 생식기가 잘려나간 시간들이 짚단 속으로 스며든다 메마른 땅바닥을 핥은 적이 있던가, 아니 없던가, 눈 내리는 낯선 아침, 은빛 토끼는 언제나 벡터를 노렸지 냉혹한 자신의 모습을 더 오랫동안 고립되어 들여다보아야 되겠다

일그러진 어항 속으로 난 숲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 플라스틱 꽃을 피운다 날리지 못하는 꽃잎들이 꽃대를 세우고 서서,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는 사랑이 바람 부는 들판에 서서 깜빡깜빡 점멸 중이다

해질녘, 검푸른 수심의 바닥을 치기 위해 깊숙이 몸을 숙인다 바닥을 친 걸까. 바닥의 바닥이 열리는 바닥을 헤엄치며 어항 속 금붕어가 뻐끔뻐끔거린다

* titan arum : 천남성과의 여러해살이 풀. 시체 냄새가 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을 피운다.
** Minotauros :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그리스 신화 속의 괴물.

  


야생동물 보호구역


1. 마담의상실

유행 지난 패션잡지들이 쌓인 바로크풍의 테이블 뒤에서 여주인이 희끗한 흰머리를 틀어 올린다 무겁게 늘어진 롱코트가 당당한 포즈의 마네킹을 짓누르고, 드러난 엄지발가락이 바깥 추위로 시리다 옷감들이 화려한 색들을 접은 채 빛바랜 조화들을 무심히 쳐다본다 꽃대가 부러진 백합 한 송이, 찬란하던 시절이 꽃다발이 마르는 시간을 훌쩍 지나 조명 아래 바스러질 듯 진열된다 햇빛 방향 따라 무성히 자란 알로에의 지치지 않은 푸른 빛깔이 가끔 여주인의 눈에 비친다

2. 붉은 여우

붉은 여우 한 마리, 갇힌 철망 사이로 맹수의 강렬한 눈빛이 살아 있다

3. 인공항문을 단 여자

직장암 수술 뒤 인공항문을 단 그녀는 이제 별일 없으면 사는 게 괜찮은 것이라 한다 야생의 한 시절을 서서히 추억한다 날 것 그대로, 꾸며도 숨겨지지 않는 그대로 생존의 시간을 견디다가 끔찍해서 눈감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녀는 지금 야생동물보호구역인 황야를 천천히 걸어가는 중이다

4. 야생동물 보호구역과 문

굵은 철망과 벽으로 둘러쳐진 공간에서 죽어가기도 하고 문을 나선 뒤 문이 사라진 허허들판에 서 있게 되기도 한다 구역과 경계가 보호가 되기도 하고 때론 구속이 되기도 하여 자신의 냄새로 경계를 지워버린 뒤 저 황야의 사냥터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간다 그녀는 끝까지 황야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겪어내는 것이다 때로 비참하고 서글프기도 하지만 초원을 향해 나아가는 맹수의 여유로움을 전하는 것이다 모두 괜찮다며 닳아가는 심지를 마른 얼굴 위로 드러내며 퍼석, 보이지 않는 웃음을 혼자 짓는 것이다





  

심사평

  

시 읽기, 정말 어렵다, 왜?


시인,이라고 시단에서 시인 노릇 한 지 50년 되는데도 시가 어렵다. 시 쓰기보다 시 읽기가 더 어려운 것을 새삼 느끼는 때는 특히 신인들의 시를 읽을 때다. 시 쓰기의 기본은 글 쓰기인데 글 쓰기의 기본의 기본도 못 갖춘 시 글들이 무성히 나돈다. 시는 非文을 허용한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시 글의 한 행을 억지로 길게 끌고 가면서 저지르는 앞 뒤

묘사의 불일치는 극단적이다. 시간, 비밀, 신화,등 추상어를 여기 저기 덧붙여서 시의 깊이나 넓이를 조작하는 것은 정말 읽어주기 싫다.

시의 애매성, 모호성, 난해성은 시가 시인의 세계관과 진정하게 연결되었을 때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시만의 독특성이다. 흔히 양가성, 중층성, 다면성, 다음성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에 도달하려면 시의 초월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단순한 혼돈, 무지, 착종만으로 모호나 난해를 드러낸 것이 시는 아니다.

시가 행을 늘이고 연을 바꿔가는 것은 반복과 강화라는 구축법이다. 시의 구조는 실은 글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신인들의 시에서 반복도 강화도 아닌 중언부언으로 이어지는 연 구조를 볼 때, 이 시인의 기술적 의도인지, 잘못된 버릇인지 의심하게 된다. 특히 산문형식의 시는 소리내어 읽고 또 읽어보고 발표하시기를 바란다.

이런 소감을 가지고도 강현숙의 시들, 특히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몇 년에 걸친 투고와 열의에는 고개를 숙인다.

                                                    ― 박의상


  

사물을 새롭게 구성하는 점묘의 시선


조영래, 석연경, 강현숙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마른 꽃 피는 밤」 등의 조영래의 작품들은 짜임새와 언어의 운용이 모두 수준급이다. 빛이 알맞게 들어간 사진들었지만, 강렬한 인상이 부족했다. 석연경의 작품 또한 고른 완성도를 보였다. 특히 「독수리의 나날-天葬」은 힘찬 어조와 활달한 상상력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당선의 영예는 강현숙의 작품에 돌아갔다. 그녀의 작품들은 點描法으로 그린 그림처럼 부분 부분에 시선을 돌리면 무의미하고 모호하다. 그렇지만 「여자의 시간을 그리다」, 「야생동물보호구역」 등은 이러한 무의미와 모호함을 삶의 무의미와 모호성으로 갈무리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점묘법은 사물에 대한 관습적인 시선의 거부, 사물을 새롭게 구성하려는 집요한 시선의 소산으로 보인다. 물론, <훤히 비치는 시간의 아침 위로>(「여자의 시간을 그리다」), <아무도 이 의미를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浮屠의 숲」) 등과 같은 어색하고 무의미한 措辭, 여과되지 않은 관념과 통제되지 않은 분방한 상상력이 무의미와 모호함에 착종되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신인상은 가능성 있는 신인을 격려하는 자리일까, 좋은 작품을 뽑는 자리일까. 고민 끝에 전자에 손을 들어주었다. 강현숙은 사물에 대한 아주 어렵고 힘든 탐색을 집요하게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위험한 길이다. 그 지난한 여정에 이 상이 한 모금의 물이 되었으면 한다.

                                                                                                           - 오탁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