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만세~” 1919년 3월 18일 정오. 진주교회, 재판소(법원), 촉석루, 매립지(이마트 앞) 등 시내 곳곳에서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7일만에 진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이다. 진주만세운동은 만세 운동의 시발점인 서울 다음으로 많은 군중이 참가한 대표적 만세운동이다.
일본경찰의 폭력진압에도 시위는 이어졌다. 18일 만세운동 이후 노동자, 기생, 걸인까지 가세해 시내에서 21일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22일 수곡면 창촌리, 25일 문산면 소문리 등 4월까지 만세운동은 이어졌다. 18일 시위참가자는 최소 1만명으로 보고 있다. 참가자 증언에는 2만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면·동·이에 이르는 자치조직들이 민중을 조직해 거사 당일 시내집결을 만들어 냈다.
향토사학자 추경화씨가 쓴 진주항일운동사에 따르면 진주만세운동의 최초 의거 예정일은 이보다 5일 빠른 13일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당시 김재화, 박진환, 심두섭 등은 그해 2월 말 고종의 인산(장례식)에 참가하기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3·1만세운동을 목격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진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 위해 다른 지사들과 함께 비밀회의를 갖는다. 3월 13일 진주장날을 선택하고 준비에 들어간다.
하지만 3월 10일 새벽 시내 곳곳에 독립운동을 바라는 벽보가 나붙는다. “왜 삼남에는 (만세운동이)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격문을 부착한 주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남’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일컫는다. 이 격문 때문에 경찰의 검문이 강화됐다. 이에 만세운동에 동조했던 순사들이 13일 예정된 거사를 미룰 것을 시위대에 조언하게 된다. 그렇게 만세운동은 다음 장날인 18일로 늦춰진다.
민중의 만세운동을 호소한 격문은 누가 붙였을까. 연구가들은 3가지로 추정하고 있다. 첫째는 김재화 등 의거를 준비한 이들이 진주의 분위기를 알아보고자 붙였다는 설이다. 민중의 동조분위기를 확인한 뒤 만세운동을 거행하는데 참고가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스스로 위험성을 안고 경찰에 발각될 빌미를 제공했겠느냐는 반론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두번째 설은 천도교에서 붙였다는 추정이다. 이 시기 천도교 진주교구는 의암 손병희의 지시로 등사기를 구입했기 때문에 다량의 격문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천도교의 정준교와 강달영이 김재화와 함께 시위를 준비하고 있는 중에 독자적 행동을 했는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마지막 설은 개인이 실행했을 가능성이다. 진주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거사를 벌였을 경우다. 하지만 몇몇 개인이 다량의 격문을 제작하고 새벽시간 동시다발적으로 시내 곳곳에 붙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10일 새벽에 나붙은 격문의 주체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진주만세운동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심인경 진주참여연대 사무차장은 “격문은 시민들에게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환기시켰을 것으로 본다. 많은 민중들이 참가한 진주만세운동에 일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강진성 기자 news24@gnnews.co.kr
일본경찰의 폭력진압에도 시위는 이어졌다. 18일 만세운동 이후 노동자, 기생, 걸인까지 가세해 시내에서 21일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22일 수곡면 창촌리, 25일 문산면 소문리 등 4월까지 만세운동은 이어졌다. 18일 시위참가자는 최소 1만명으로 보고 있다. 참가자 증언에는 2만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면·동·이에 이르는 자치조직들이 민중을 조직해 거사 당일 시내집결을 만들어 냈다.
향토사학자 추경화씨가 쓴 진주항일운동사에 따르면 진주만세운동의 최초 의거 예정일은 이보다 5일 빠른 13일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당시 김재화, 박진환, 심두섭 등은 그해 2월 말 고종의 인산(장례식)에 참가하기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3·1만세운동을 목격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진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 위해 다른 지사들과 함께 비밀회의를 갖는다. 3월 13일 진주장날을 선택하고 준비에 들어간다.
하지만 3월 10일 새벽 시내 곳곳에 독립운동을 바라는 벽보가 나붙는다. “왜 삼남에는 (만세운동이)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격문을 부착한 주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남’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일컫는다. 이 격문 때문에 경찰의 검문이 강화됐다. 이에 만세운동에 동조했던 순사들이 13일 예정된 거사를 미룰 것을 시위대에 조언하게 된다. 그렇게 만세운동은 다음 장날인 18일로 늦춰진다.
민중의 만세운동을 호소한 격문은 누가 붙였을까. 연구가들은 3가지로 추정하고 있다. 첫째는 김재화 등 의거를 준비한 이들이 진주의 분위기를 알아보고자 붙였다는 설이다. 민중의 동조분위기를 확인한 뒤 만세운동을 거행하는데 참고가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스스로 위험성을 안고 경찰에 발각될 빌미를 제공했겠느냐는 반론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두번째 설은 천도교에서 붙였다는 추정이다. 이 시기 천도교 진주교구는 의암 손병희의 지시로 등사기를 구입했기 때문에 다량의 격문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천도교의 정준교와 강달영이 김재화와 함께 시위를 준비하고 있는 중에 독자적 행동을 했는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마지막 설은 개인이 실행했을 가능성이다. 진주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거사를 벌였을 경우다. 하지만 몇몇 개인이 다량의 격문을 제작하고 새벽시간 동시다발적으로 시내 곳곳에 붙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10일 새벽에 나붙은 격문의 주체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진주만세운동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심인경 진주참여연대 사무차장은 “격문은 시민들에게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환기시켰을 것으로 본다. 많은 민중들이 참가한 진주만세운동에 일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강진성 기자 news24@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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