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마도 여행기
대마도 여행기
eskim3.com.ne.kr/documents/life/.../daemado.htm -- 김의수 |
PROLOGUE
대마도... 그 곳은 분명 우리의 땅이었다. 척박한 땅이었고 조선조나 일본에서도 대마도는 버려진 땅이었다. 대마도는 세종때 우리 영토에 편입되었다. 대마도는 막부시대 이전까지 일본 땅으로 속한 적이 없다. 당파싸움에 휘말린 우리 조정의 못난 탓으로 대마도는 관심밖의 땅이 되어 버렸고 그틈에 일본은 대마도를 발판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대마도는 일본땅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작금에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시점에서 독도는 우리땅임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옛 우리의 땅이었던 대마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 대마도를 '국제 영토분쟁지역'으로 만드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시점이 온것이다. 모든 국가간의 분쟁에서 그러하듯이 그것은 국력이 우선된다. 비록 지금은 일본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을 지라도 국력을 키워 대마도를 우리의 땅으로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대마도는 광개토대왕 비문, 고려사, 조선왕조실록등의 역사적 근거가 명료하기 때문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 진주에서 대마도 까지
독도 문제로 열이 올라 있었는데 한국청소년경남연맹에서 교장선생님 대상으로 "조선통신사의 길"이라는 테마로 자비 50%(20만원)의 문화탐방 참가 권유에 흔쾌히 승낙하고 2005년 8월 18일부터 20일까지 2박3일의 일정으로 진주에서 6명을 포함 44명이 대마도를 간다. 나에게 이번 여행은 대마도를 우리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염원이 담겨진 탐방여행이다.
며칠에 걸려 여행 준비를 하고 8월 18일 05시 55분 진주에서 버스를 타고 마산에 내려 마산역으로 간다. 7시 30분 경남연맹에서 준비한 관광버스로 창원을 거쳐 동행하는 교장선생님들을 태우고 9시 30분 부산 국제여객 터미널에 도착한다. 출국수속을 밟고 10시 30분 Sae flower호를 타고 대마도 북단의 히타가츠로 향하여 출발하게 된다.
부산 국제여객 터미널
대마도(對馬島, Tsushima)의 총 면적은 709㎢ 로서 제주도 보다는 1/2 크기며 거제도의 1.7배 정도로 남북 82km 동서 18km로 새우모양의 섬이다. 지리적인 거리로 따지면 일본 본토보다는 우리와 더 가까운 섬이다. 부산에서의 거리가 49.5km로 일본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 까지의 거리는 138km 이다. 완도에서 제주도 까지의 거리가 90km 이니 제주도 보다도 더 가까운 섬이다. 대마도는 본섬외에 109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사람이 사는 곳은 5곳, 나머지는 모두 무인도이다. 섬 전체의 88%가 산악이고 원시림이며 본토에서 볼 수 없는 많은 대륙계 동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옛부터 대륙(한반도)과의 인적 물적 교류의 창구로서 많은 사적 등 문화유산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섬이기도 하다. 인구는 약 4만 6천명 정도 인데, 국경의 섬이다 보니 전략요충지가 되어 이들 중 반 이상이 군인 또는 공무원이며 실제 토착주민은 2만명에 불과하다.
대마도의 주력 산업은 관광이지만 관광 Infra는 턱없이 부족하다. 섬 전체에 변변한 회사도, 공장도 없다고 한다. 그 덕에 맑은 공기와 바닥이 비칠 정도로 맑은 바다, 그리고 조엽수림을 주축으로 하는 원시림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대마도의 관광자원으로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나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95% 가 한국인으로 예나 지금이나 대마도는 일본에 속해 있으면서도 한국만 바라보고 사는 처지다.
한국인들의 대마도 관광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뉜다고 한다. 첫째가 바다낚시다. 주로 겨울철부터 3월 말까지가 바다낚시 철이라고 하는데, 100마리는 예사란다. 30cm 미만은 방류하라고 안내까지 한다. 두 번째 관광 형태는 등산이라고 한다. 주로 주말을 이용하여 등산객들이 온다는데, 북적대지 않고 조용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자연에 매료되어 찾아오는 등산객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마지막 관광 형태가 이른바 '역사기행' 되겠다. 이는 대마도와 우리나라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많은 역사적 유물들을 답사하는 형태의 여행인데, 주로 여름철에 많이 온다고 한다. 대마도가 시로 승격된 후 도처에서 도로 등 관광Infra 공사가 한창이다. 대마도는 한 번 찾아왔던 사람들만이 다시 찾는다고 한다.
부산 앞바다에서 보이는 지척의 대마도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승선매표소(부산 ↔ 대마도 왕복 124,000원, 단체 111,600원)
좌로부터 김의수 정주훈 정호영 노일웅 화영복교장님 한사람 건너 윤철희 경남연맹 사무국장
터미널내 면세점(25,000원 담배 한보루가 15,000원에 한정판매)
2. 대마도 탐방여행
2005년 8월 18일 12시 부산에서 1시간 30분만에 히타가츠에 도착한다. sea flower호 밖으로 보이는 대마도 해안은 거제도의 그 것과 다를바 없다. 한적한 우리나라 시골의 아담한 작은 항구라는 느낌이다. 국제여객터미널의 길게 늘어선 입국심사는 우리나라 사람들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대마도 북단의 히타가츠에 도착
히타가츠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입국심사중(낙후된 시설이었다)
점심 먹으려 들어간 고급식당은 간결하면서도 실용적이었다. 좁은 계단, 좁은 시설들... 공간은 넓지 않아도 식사에는 불편하지 않다. 과용하지 않는게 일본의 국민성 이란걸 느끼는 순간 이었다.
두 대의 25인승 소형버스로 본격적인 문화탐방의 여행길에 오른다. 한국전망대 가는 길옆의 미우따하마 해수욕장에 잠깐 들린다. 공기가 맑고 바다물이 맑으며 모래가 곱다.
8월 18일의 미우따하마 해수욕장
태평양을 배경으로
미우따하마 해수욕장의 조망
한국전망대 대마도 가장 북단에 위치한 와니우라는 한때 왜구의 본거지였으며 특히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주요 집결지로 군량을 보관하던 곳이라 한다. 현재도 일본의 공군과 해상 자위대가 부근에 주둔하고 있어 그 군사적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는데, 이곳 와니우라의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에 팔각정 건축물 한 채가 서 있다. 바로 이 건물이 '한국전망대'이다.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으므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다 건너편으로 부산시와 거제도까지 바라다 보인다고 한다.
한국 전망대
전망대 앞의 공군과 해군 일본자위대 시설물
그 날은 시야가 흐려 부산과 거제도가 보이지 않았다.
한국전망대 바로 옆에는 '조선 역관사 조난비가 세워져 있다. 와니우라 이곳은 한국과 대마도 간의 주요 항로가 되어 왔으며, 1703년 2월 5일(음력, 숙종 29년) 당시 대마도에서 5대 번주(藩主, 섬 전체 우두머리) 종의진(宗義眞)이란 자가 습봉(襲封, 제후가 윗대의 영지를 물려받음)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사절단 파견을 위하여 실무진들을 먼저 파견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역관(譯官)이다. 역관은 일종의 통역사지만, 당시에는 단순한 통역 이외에도 실질적 외교 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에서 파견된 역관 108명과 이들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측 역관 4명이 부산항을 떠나 대마도에 입항을 하기 직전,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에 의해 그만 앞바다의 암초들에 의해 배가 좌초되면서 112명 전원이 사망을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조선역관사 조난비'는 바로 이 때의 사고를 추념하고 당시 사고의 배경이 선린우호를 바탕으로 한 국제교류에 있음을 감안하여, 1991년 3월, 한 일 양국 유지들의 힘을 모아 세워진 비이다. 비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이러한 유래와 함께 당시 사망한 112명 역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이 서 있는 기단 역시 의도적으로 112개의 돌로 쌓았다고 한다.
조선역관사 조난비
382번 국도는 대마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유일의 국도이다. 험준한 이곳 지형 탓에 매우 비좁은 왕복 2차선 도로는 맞은편에서 좀 큰 차라도 오면 비켜서고 조심스레 지난다. 대마도에는 터널을 100여곳이나 뚫었단다. 운전석이 오른편에 있고 주행선도 우리나와는 반대 차선으로 주행한다. 가이드 말로는 3일 정도 지나면 적응이 된다고 한다. 일본의 외사촌 형님이 자기 차를 우리나라에 가져 왔을 때 진주에서 서포까지 손수 운전하여본 경험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눌러대는 우리와 달리 통행자 위주의 일본 운전습관은 클락션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커브에서 비켜준 상대방 운전수에게 감사의 클락션은 들었다. 그리고 대마도에는 도로에 과속방지턱이 없었다.
대마도 382번 국도는 과거 '조선 통신사'들이 대마도에 내려 일본 본토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공식 통로라는 점이다. 대마도 북서쪽의 사스나 항(와니우라보다는 남쪽에 있음)으로 들어온 통신사 일행은, 일본 본토 출발지인 이즈하라 항까지 지금의 382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조선 통신사의 전철을 따라 대마도를 답사하고 있는 것이다.
대마야생생물 보호센터가 있는 샤오자키공원으로 갔다. 삵(야생고양이 일종)이 대마도의 상징 동물로 지정되어 있다. 멸종되어 가는 삵과 야생생물을 보호하는 노력은 돋보이지만 보호센타와 샤오자키 공원은 볼품 없었다. 대마도의 원시림이 눈길을 끈다.
대마도 원시림 - 샤오자키 공원에서
일본의 관공서 사무실(대마야생생물 보호센터) 공간 - 좁게 사느게 생활화 되어있다
미네역사자료관 밀랍인형
일본 전통 민속자료 - 우리 선조들의 그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미네역사자료관을 구경하고 오후 5시 30분 숙소인 이즈하라의 tsushima dae-a hotel에 도착한다. 쓰시마 대아 호텔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대마도 최고의 호텔이다. 그러나 시설면에서는 진주의 동방호텔의 절반도 안되는 것 같다. 이즈하라 언덕위에 위치하여 시원한 바다가 펼쳐지고 주변에 다른 건물이 거의 없어 조용하다.
숙소에서 내다 보이는 시원한 바다
호텔 후면의 조경(2층 숙소에서 촬영)
이즈하라에서 최고의 시마모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해물 샤브샤브가 주 메뉴다. 다다미 바닥위의 테이블에 진수성찬이 준비된다. 미인의 여주인 시마모또가 손수 음식도 써빙하고 술도 따라주고 마신다. 일본은 친절이 몸에 배인 민족이다. 식사후에는 무대위에서 일본음악에 맞추어 춤사위를 공연한다. 소주에 취하였다. 아니 일본의 문화에 취하여 보았다. 가라오께(노래방) 시간에 진주를 대표하여 무대에 섰다.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부를려다가 나이가 많은 사람들 앞이라 배호의 '파도'를 불렀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정원에서 맥주파티를 한다.
이즈하라의 시마모또 식당
자기 소개의 시간
무대위의 무희와 주인 시마모또
무희의 춤사위 - 식사를 즐겁게 하여 준다
가라오께 시간 - 노래하는 일행과 시마모또
어젯밤 맥주파티후 로비에서 정호영 교장님과 5판의 바둑을 두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나 6시에 기상하여 호텔에서 일출을 맞는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빛난다. 정원을 산책하고 산뜻한 기분으로 가슴에 대마도를 담는다.
떠오른 태양
아침을 맞은 숙소
산책후 숙소 앞에서
두째날 오늘은 등산이 있는 날이다. 519m의 백악산(시라다께산)은 백악산 국정공원 입구에서 10.4km로서 소요시간이 4시간 가량이다. 원시림으로 삼나무와 편백이 주류를 이루고 정상부근의 2개의 바위봉우리가 마치 2 마리의 말이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대마도라는 섬이름이 만들어 졌다고도 한다.
백악산 전경
국정공원 백악산 안내판
등반 체력의 부족함을 느끼면서 쉬엄 쉬엄 등산로를 따라 간다. 민속신앙인 신사(神社)를 백악산 중간중간 만난다. 신령을 모신 곳이란다. 정상 직전에 구름낀 날씨는 마침내 소나기를 뿌린다. 백악산 정상에서 운무에 쌓인 아스만과 대마도를 굽어본다.
길가의 아름다운 꽃은 시각을 즐겁게 하고...
산행의 절반은 습습한 기운의 등산로였으나 계곡물은 깨끗하였다.
일본의 대표 수종인 삼나무와 편벽나무(간벌이 이루어 지고 산림관리를잘하고 있었다)
등산로에서 한 컷
조망되는 바다
운무에 쌓인 백악산
하산중에도 간혹씩 소나기를 만난다. 여행 가이드가 자주 이야기하는 여보챙기기(여권, 보따리)에 문제가 생겼다. 허리가방에 빗물이 스며들어 지갑과 여권이 젖어 버렸다. 큰 문제는 아니다. 3시간의 등반을 마무리하고 호텔로 돌아온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구름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바다위의 햇살
점심식사후 아스만이 조망되는 카미자카 전망대를 오르고 돌로 지붕을 만든 건축물이 많은 이시야네를 둘러 본다. 이지방의 대지주의 식량창고 이었다 한다.
흐린 시야에 비친 아소만
화영복 교장님과 돌지붕 건축물 앞에서
일본의 납골문화
대마도 농촌 부호들의 가옥
중앙선이 없는 좁은 도로를 천천히 섬 남쪽으로 향한다. 꾸불구불 도로를 한참 오르내려서 은어가 돌아온다는 계곡, 수려한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린 공원, 아유모도시 자연 공원으로 간다. 강 전체가 천연 화강암으로 덮여진 일본 전국에서도 진귀한 곳이며, 구름다리, 산책로, 놀이기구, 캠프장 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는 곳이다. 계곡 전체를 휘감고 있는 천연 화강암 사이로 물이 아주 빠르게 흐른다. 출렁다리를 건너 계곡에 내려가 물에 손을 담가 본다. 일본열도는 화산지대로 한반도와 지질이 다르다. 대마도는 화강암이 있는 점으로 비추어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증명된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안내도
출렁다리
천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아유모도시 계곡
일본에는 온천문화가 잘되어 있다. 숙소 바로 위 길가에 이즈하라시에서 시민을 위한 두평 정도의 넓이의 무료 족탕 온천이 있다. 발을 담구고 둘러 앉아 그 지역 사람들과 가이드의 통역으로 담소를 나눈다. 3일째 아침에도 호텔의 목욕탕에서 온천욕을 한다. 그리고 조찬전에 바둑을 3판 둔다.
2박을 하였던 호텔의 다다미방 내부
이즈하라 시가지 안내도
비내리는 이즈하라 시내
길거리의 일본 신사
시내 하천 - 벽과 바닥 공사가 우리 보단 세련되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슈퍼마켓
숙소를 떠나는 마지막 날 오전에는 비가 내렸다. 9시 이즈하라 시내까지 버스로 이동하여 도보로 유적지 관람을 하기로 한다. 시내 중심가에 백제시대 비구니 법묘스님이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수선사를 견학한다. 아담하고 소담스러운 절이다.
경내에 구한말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최익현선생의 넋을 기리는 순국비가 있다. 순창에서 의병을 이끌고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일본관헌에 의해 대마도에 유배된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순국비는 1986년 한 일 양국의 뜻 있는 사람들이 세웠는데, 이 곳에 비를 세운 이유는 순국한 곳이 대마도이고 이곳 수선사에서 장례를 지냈기 때문이다. 옆에는 무궁화가 피어 있었다.
최익현선생 순국비
낮 12시가 되면 우리 귀에 익숙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고향의 봄' 동요가 흘러 나오는 대마도(이즈하라)시청을 지나고 이웃에 있는 고려문을 들어서면 조선통신사비가 있고 대마역사자료관이 있다. 자료관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보존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국교가 정상화 되고 외교사절의 목적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년 동안 모두 12회에 걸쳐 조선통신사가 파견된다. 외교적인 행사뿐만아니라 문학과 예술, 학문을 논하는 종합적인 축제였으며 한·일간에 문화가 흘러가는 통로역할을 했다. 처음 세 번째까지는 막부 장군의 국서에 대한 회답과 전쟁 때 잡혀간 포로를 송환하는 임무를 띄었으며 나머지 9번은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을 축하하기 위해 에도(江戶, 도쿄)까지 갔다왔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탐색의 목적도 지녔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육로로 간 뒤, 부산부터는 쓰시마 도주의 안내를 받아 배로 쓰시마를 거쳐 시모노세키~오사카~요도카와(淀浦)에 상륙했다. 그 때부터는 육로로 쭉 교토까지 간다. 1711년 통신사때 일본측의 접대 지출 총경비는 은 1백만냥, 인부 33만명, 말 7만7천600마리 등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 모자 쓰고 말 위에 올라탄 이들은 모두 조선인, 모자 벗고 걸어가는 이들은 모두 일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가늠해진다.
조선 제 26대 왕 고종이 회갑때 얻게 된 고명딸 비련의 덕혜옹주 기념비를 거치고 하치만구 신사에 들러 일본 문화에 근접하여 본다.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고종황제의 고명딸 덕혜옹주의 기념비
하치만구 신사
신사 앞에 있는 일본 國花인 菊花 문양 - 벚꽃(사꾸라)은 일본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꽃이다.
점심먹었던 기온식당 - 대마도 특식 짬뽕을 먹었다.
sea flower호 옆에서
이즈하라 시내에서 중학교(진주중학교 15회) 동창 이연근 가족을 만난다. 하루 늦게 대마도에 왔으나 출항이 같다. 경상남도 교육의원이고 교육위원회 의장을 지낸 꿈이 대단한 친구이다. 얼마전 진주시내에서 술한잔 한것 때문인지 선상 매점에서 양주 1병을 나에게 선사한다.
이연근 친구 가족
친구와 이즈하라 여객터미날에서
현애탄을 건너 부산으로 가는 sea flower호는 풍랑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약을 먹었으나 멀리로 고생을 심하게 하였다.
EPILOGUE
관광인프라가 부족하여 관광자원은 거제도보다 훨씬 모자라는 못하는 대마도, 일본본토보다 한국이 더 가까워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반도에 의존도가 높은 대마도 그 대마도는 우리의 땅으로 돌아와야 한다. 국력을 키우고 힘이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중국의 요동반도, 만주벌판과 함께 우리땅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 우리대에서 이루지 못하면 후대에서라도 반드시 이룩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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