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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값 세상'은 오지 않는다

공수거 2012. 12. 13. 13:03

[홍준호 칼럼] '반값 세상'은 오지 않는다

  • 홍준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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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2.12.11 22:50

    득표용 반값 公約들 일주일 뒤면 정권에 부담
    이행하면 살림 거덜나고 약속 안 지키면 정권 흔들
    부풀려진 '반값 세상' 기대 확 낮추자고 누가 설득하나

    홍준호 논설위원
    박근혜 후보 공약집은 '국민 걱정 반(半)으로 줄이기'로 시작한다. 집 한 채 마련하느라, 자식 등록금 대느라, 고금리 사채 쓰느라 국민 개개인이 진 빚을 대신 줄여주고 집값·전셋값, 애 키우는 보육비, 초·중·고·대학생 교육비, 노후 비용, 의료비, 일자리 걱정을 절반씩 덜어주겠다는 약속들이 빼곡하다. 20대 분야 201개 공약을 실현하는 데 5년간 131조원이 든다고 한다. 문재인 후보는 그보다 61조원이 많은 192조원짜리 공약집을 내놓았다. 문 후보의 키워드 역시 '반값'이다. 교육·의료·주거·통신비 등 국민의 필수 생활비를 절반으로 낮추겠다고 했다. 박 후보의 '국민 행복 시대', 문 후보의 '사람이 먼저인 세상'은 모두 '반값 세상'인 모양이다.

    안타깝지만 두 후보가 약속한 '반값 세상'은 이 땅에 금방 오지 않는다. 그런 천국이 쉽게 올 수 없다는 걸 양 진영도 모르지 않는다. 엊그제 만난 박 후보 참모는 "국민 기대가 너무 높아져 걱정"이라고 했다. 문 후보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인사도 "솔직히 말해서 다음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국민보고 참아달라고 설득할 수 있는 리더십일 것"이라고 했다. 선거를 앞두고 달콤한 약속들을 쏟아내는 양측도 바닥이 어딘지 모른 채 곤두박질치는 나라 안팎의 경기 지표에서 눈을 떼진 않고 있다.

    누가 당선되든 국민 마음속에 자리 잡은 높은 기대치에서 거품을 빼는 작업, 일종의 출구 전략은 불가피해 보인다. '반값 세일' 기간은 오는 19일까지뿐이어야 한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 등장할 18대 대통령 당선자가 곧바로 출구 전략으로 방향을 잡기엔 두 후보 모두 그동안 너무 한쪽 방향으로만 달려왔다.

    과거엔 선거가 끝나면 각계 전문가들이 당선자를 향해 "득표용 공약부터 잊으라"는 주문을 쏟아냈다. 집권에 실패한 정당은 국정 철학이 다른 정책이란 또 다른 이유로 집권자의 대표 공약들을 견제하고 제동을 걸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표 공약인 수도 이전은 한나라당의 반대와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현재의 세종시로 축소 변형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이 4대강 사업으로 축소 변형된 것도 야당인 민주당의 비판과 반대 탓이 컸다.

    이번엔 이 같은 견제·제동 장치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서로 반값 세상을 만들겠다며 오십보백보의 약속들을 내놓아 정파(政派) 간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당선자 측이 공약을 이행하겠다고 하면 현실 적합성이 있는지 따져보자고 할 세력은 없고, 약속을 축소 변경하려 할 경우 "아낌없이 준다더니 왜 약속을 안 지키나"라고 달려들 세력만 버티고 있다. 또한 수도 이전, 대운하, 동남권 신공항 등은 특정 분야나 특정 지역에만 해당하는 사업이다. 그 사업을 물리거나 줄이는 쪽으로 손대면 해당 분야, 해당 지역 사람들만 들고 일어선다. 이에 비해 박 후보와 문 후보의 '반값 세일'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실상 모든 국민에 해당한다. 나이, 소득, 지역, 성별의 구별이 없다. 정권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터져 나올 욕설과 저항을 견딜 맷집이 없으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대신 절반의 비용을 대줄 것처럼 떠들어댄 약속들을 거둬들이거나 축소 변형하자고 나서기 힘들다. 복지의 확대는 필요하지만, 하나하나 정책 결정엔 신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알려진 대로 일본 민주당은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아동수당, 고속도로 무료화 등 무상 복지 패키지 공약을 내놓고 대승했으나 집권 후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줄줄이 공약을 철회하고 그때마다 대(對)국민 사과를 했다. 정권 지지도는 곤두박질쳐 며칠 뒤 선거에서 정권 교체가 예상되고 있다. 반값 공약으로 탄생할 우리 차기 정부가 이와 비슷한 길을 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무리하게 공약을 지키려고 밀어붙이다간 나라 살림이 거덜나고 공약을 물리면 정권이 흔들린다.

    박 후보와 문 후보 중 한 사람은 일주일 뒤 대통령 당선자로 신분이 바뀐다. 그 순간 당선자 책상엔 국정 과제가 수북이 쌓일 것이다. 그러나 18대 대통령 당선자가 다른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그동안 본인이 부풀려온 반값 세상에 대한 기대치를 절반 이하로 확 끌어내리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반값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어음과 함께 반값 세상을 앞당기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비용 청구서도 함께 보내야 하는 자리다. 국민 기대치를 끌어내려 놓지 않고선 국민보고 참고 기다려 달라거나 고통을 나누자고 설득하려 해도 통하지 않는다. 차기 대통령 당선자 본인 말고는 다른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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