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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3.1운동 시발점은 교회 종소리"

공수거 2013. 2. 20. 19:40

 

"진주3.1운동 시발점은 교회 종소리"
 
향토사학자 추경화씨, 입증자료 추가 확인
2013.02.20 00:00 입력 경남일보
일제강점기 당시 진주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신호가 종소리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추가로 확인돼 지역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진주 3·1운동은 1919년 진주장날인 3월18일 정오를 기해 시내 곳곳에서 일제히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는데, 당시 천대받던 기생과 걸인은 물론 시민, 학생, 종교인까지 동참한 거국적인 민족운동이다.
그 규모만도 수만을 헤아리고 일주일동안 계속됐다고 전해진다. 일제는 3·1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진주에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독립투사들을 사전에 구속하는 등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당시 진주시민들은 정오를 기해 일제히 만세운동에 동참했는데,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두고 오랜 세월 의견이 분분했다.
일부 향토 사학자들은 그 신호를 진주 비봉산에 울린 나팔소리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 당시 일제 경찰이 기록한 ‘고등경찰관계적록’에는 ‘3월18일 진주장날 예수교 예배당에서 정오에 울리는 종소리를 기하여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니’라고 기록돼 있다.
해방 후 최초관찬 기록인 경상남도지(1959년)와 당시 광림학교 학생들을 동원한 한규상 선생의 ‘나의 조국, 나의 교회’라는 자서전은 교회 종소리로 언급하고 있다.
반면 정부부처인 국가보훈처는 1971년 발행한 3·1운동사에서 나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울산지역 향토사학자인 이용락 선생이 1969년 펴낸 3·1운동실록에서도 나팔이라고 기록돼 있어 시발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만한 자료가 추가로 확인됐다.
향토사학자 추경화씨는 “유명한 사학자이자 독립투사인 박은식 선생이 1920년에 집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진주 3·1운동은 다수의 군중을 잠복시키고 교회 종소리로 신호를 약속했다’는 문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한 “항일독립투사인 김승학 선생이 해방전에 기록하고 1966년 발행한 한국독립사 상권 진주의 운동상황 편에도 ‘예배당 종소리로 신호를 약속하였다’는 문구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추씨는 “여러 문헌을 비교해 보면 1960년대까지는 한결같이 교회 종소리로 신호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1969년 부터 잘못된 내용이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면서 “이제라도 잘못된 기록은 모두 폐기하고 진주3·1운동사를 올바르게 기록,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뜻있는 이들의 서명을 받아 이른 시일내로 정부기관인 국가보훈처에 유권해석을 신청할 예정이다
한편 당시 3·1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진주교회의 종과 종각은 지난해 뜻 있는 이들의 정성으로 100여 년 만에 복원된 바 있다.




임명진 기자 sunpower@gnnews.co.kr